1. 같은 도시, 다른 여름 – 기후가 만든 계급의 경계
기온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높아지지만, 그 더위를 견디는 방식은 계층에 따라 다르다.
같은 도시, 같은 날씨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에어컨이 켜진 실내에서 여름을 보내고,
누군가는 창문조차 제대로 열 수 없는 방에서 찜통 같은 열기와 싸운다.
기후 불평등(climate inequality)은 단지 환경 문제가 아니라,
소득·주거·에너지 접근의 차이로 인해 폭염의 위험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는 구조를 말한다.
이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차이에서만 벌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안에서도,
‘더위는 가난한 사람에게 더 위험하다’는 구조적 현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폭염 취약 계층은 저소득층, 독거노인, 장애인, 반지하 거주자, 옥탑방 거주민 등이다.
이들은 냉방기기 보유율도 낮고, 보유하더라도 전기요금 부담 때문에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다.
실제로 서울시의 조사에 따르면, 폭염 사망자의 약 78%가 노인과 에너지 빈곤층에게서 발생하고 있다.
기후 위기는 모두에게 찾아오는 재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피해가 특정 계층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재난'이기도 하다.
2. 에어컨이 있는 삶 vs 없는 삶 – 에너지 접근의 불평등
기후 위기 속 여름을 안전하게 보내기 위한 기본 조건은 무엇일까?
그중 가장 기본적인 생존 수단은 바로 ‘냉방권’, 즉 적절한 온도에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모두가 에어컨을 켜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 빈곤층은 냉방기기를 갖고 있어도 전기요금이 무서워 틀지 못하고,
창문과 선풍기에 의존해 35도 이상의 실내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한다.
한국에너지공단의 2023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약 9.2%가 에너지 빈곤층에 해당하며,
이 중 상당수가 폭염 기간 동안 냉방을 ‘의도적으로 피하거나 줄인다’고 답했다.
냉방권의 불평등은 곧 건강 격차로 이어진다.
냉방 부족은 열사병, 탈수, 심장 질환 악화 등 다양한 건강 위협을 유발하며,
특히 고령자와 만성질환자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제 냉방은 사치가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 권리로 인식되어야 하며,
국가와 지자체는 이를 공공복지의 일부로 보장하는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
3. 더위를 설계로 바꾼다 – 도시 구조와 공공 냉방의 역할
기후 불평등은 주거 환경과 도시 구조의 차이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열섬이 심한 지역은 대부분 녹지가 부족하고, 바람길이 차단된 고밀도 주거지역이다.
이런 지역은 주로 **저소득층 밀집 지역, 낙후 주택가, 비공식 거주지(옥탑·반지하 등)**와 겹친다.
즉, 도시의 더위는 설계의 결과이며,
폭염의 피해는 단순히 기온이 아닌 도시 구조에서 비롯되는 기후 취약성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국내외에서는 공공 쿨링센터(Cooling Center)와
그늘막, 공공쉘터, 바람길 설계 등이 주목받고 있다.
서울시와 부산시는 여름철 폭염에 대비해
노인복지관, 동주민센터, 도서관 등을 쿨링센터로 지정하고 있으나,
여전히 정보 접근성과 이동성 면에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설계의 차이는 기후 적응력의 차이로 이어진다.
공공공간에 그늘이 있는가, 벤치에 차양이 있는가,
버스 정류장에 냉방 시스템이 있는가와 같은 작은 차이가
폭염 대응력에 큰 격차를 만든다.
건축과 도시 설계는 이제 기후 격차를 줄이는 수단이 되어야 하며,
‘누구는 시원하고, 누구는 견디는’ 도시가 아니라,
모두가 생존 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한 필수 도구가 되어야 한다.
4. 기후 정의는 가능한가 – 불평등을 넘어서는 도시의 조건
‘기후 정의(Climate Justice)’는 단순한 환경 슬로건이 아니다.
그것은 기후 위기의 피해를 누가, 얼마나, 어떻게 받는지를 고려하는 정의의 개념이다.
폭염은 모두에게 찾아오지만,
그 피해는 가장 약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다가온다.
기후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책적·설계적 노력이 요구된다.
에너지 복지 확대:
냉방기기 지원, 전기요금 지원, 고효율 기기 보급 확대.
공공 공간의 쿨링 인프라 확충:
이동 가능한 쿨링버스, 쉘터, 그늘막, 안개 분사형 냉방장치 등
실질적인 공공 냉방 시스템 구축.
도시 설계 단계에서 기후 취약계층을 고려:
열섬 지도, 소득 지도, 인구통계학적 자료를 반영한
기후 민감형 도시설계 모델 필요.
커뮤니티 기반 기후 대응 체계 구축:
주민 주도의 대응 매뉴얼, 자치 단체 연계 돌봄 시스템 등
사회적 안전망을 포함한 기후대응력 강화.
우리는 이제 도시를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있게’ 만드는 설계를 고민해야 한다.
기후 위기 앞에서 ‘누구는 시원하고, 누구는 견디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기후 위기는 모두에게 오지만, 피해는 평등하지 않다. 에너지 빈곤과 도시 구조의 격차는 여름을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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